편집 2010.12.2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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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의존은 가난과 독재 망국의 길
[연재-56] 말리와 부르키나파소의 비극의 역사
유태영 박사
[편집자 주: 아래 유태영 박사의 글에 나와 있듯이 상카라 전 대통령의 자주적인 정책은 주민들의 행복을 가져다주었지만 친미구데타 정권은 가난과 무권리 밖에 준 것이 없다. 외세의존은 망국의 길이다. 유럽같이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도 미국 경제에 종속되어 있다보니 지금도 계속 경제위기에 파업과 시위로?엉망이다. 우리나라도 외세의존과 자주의 길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이제 심각히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그 민족의 출중한 지도자를 지켜내지 못했을 때 어떤 비극이 찾아오는지도 이번 유태영 박사의 글을 통해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의 지도자를 잘 뽑고 또 지키는 것은 민족운명의 관건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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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키나파소 상카라 전 대통령, 이 민족의 영웅을 암살로 잃게 되는 순간 그 나라는 가난과 암흑에 빠져들었다. ? ? ?설명글: 자주민보
역사적으로 식민통치로 인하여 이 지구상에서 가장 고난을 당하는 나라들은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들이다. 그 중에서도 서아프리카에 속하는 12개의 군소 국가들은 식민통치의 유산에서 발생하는 군사독재와 사회적 부조리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종주국들이 부추기고 조장하는 부족들간의 분쟁으로 인하여 재생산되는 기근과 굶주림은 서아프리카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박혀있는 비극이다.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잠재량만으로도 전 세계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으며 프랑스의 곡물 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를 종주국으로 삼고 몇백년을 살아 온 서아프리카의 나라들이 굶주림으로인한 죽음의 무덤들이 날마다 늘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제정신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필자는 지상 최대의 사하라 사막지대에 옛날부터 자리잡고 있는 서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굶주림의 죽음과 눈물에 대하여 차레차레로 고찰해 보려고 한다.


말리의 간추린 역사

말리 공화국은 면적이 1,240,140km2로 한반도의 5.6배가 되는 사막의 나라이다. 면적으로는 세계에서 24번째로 큰 나라이지만 인구는 약 1,100만명이고 주로 아아프리카 원주민이 99%를 차지하고 있다. 아프리카 원주민 에서 특히 밤바라족과 투아렉족은 특이하다. 밤바라족은 정부의 공직에 종사하지만 투아렉족은 주로 사막을 이동하면서 살고 있는데 그들은 옛날부터 전쟁능력과 예능에 특이한 재능은 보유하고 있는 종족으로 지금도 유명하다. 공용어는 종주국의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종교는 90%가 이슬람교이고 토착종교와 기독교가 1%의 소수이다.

말리 사막지대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의 암벽화 유물들로 보아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는 상업무역이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처음 알려지진 제국은 8-13세기의 가나제국 이였으며 13-14세기에는 말리 왕국, 14-16세기에는 송가이 왕국들이 대표적이며 이 왕국들은 북부에 있는 나이저강 연안에서 교역과 이슬람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1591년에 모로코 원정군이 송가 왕국을 멸망시키고 오래동안 말리를 지배했다.
그리고 1800년대에 이르러서 프랑스가 점령하여 계속 지배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1850년부터 아프리카 내륙에 침투하기 시작하여 1864년경에는 이 지역의 여러 부족들이 프랑스에 완강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1883년에 말리를 완전히 점령하였고 1899년에는 말리-세네갈-니제르 통합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그후 프랑스는 1920년에 프랑스령 수단으로 명명하고 서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 공동체에 편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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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후 1956년에 프랑스는 이른바 기본법에 의하여 식민지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였고 1958년 11월에 프랑스 공동체에서 드디어 독립을 했다. 1959년에 말리와 세네갈은 더불어 <말리 연방>을 구성하여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1960년 8월에 말리와 세네갈은 연방제를 해체하고 각각 공화국으로 독립국이 되어 새출발했다.


말리 공화국에 대하여

1960년 9월28일에 말리는 모디보 케이타를 국가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하고 UN에 가입하였으며 비동맹 중립국임을 선언하고 사회주의를 국시로하는 내부정책과 외교적 노선을 천명했다.

1961년에 말리영토에 점령군으로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완전히 철수함으로 역사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전개?다. 1961년 3월에 말리의 케이타 대통령은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경제협력과 문화교류? 긴밀한 우호협정들을 친히 체결했다.

뿐만 아니라 케이타는 초대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국가건설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과거의 외국자본의 경제체제를 완전히 봉쇄하고 새로운 자립경제 체제를 도입하고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시키면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967년에 케이타 대통령은 <국방과 개혁위원회,CNDR>를 창설하여 국가적으로 새로운 통치기구를 설립하여 경제적 평등과 젊은 세대의 등장 및 부패추방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케이타 대통령의 아와같은 의욕적인 정치적 지도력은 말리의 역사에서 처음 보는 경이로운 새시대의 희망이였다.
하지만 케이타 대통령의 의욕적인 정치개혁은 옛 종주국인 프랑스의 검은 구름과 냉전시대의 개막을 선포한 미국의 폭풍우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이 거대한 장벽에 부디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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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1월 19일에 서방이 지원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을 등에 업고 등장한 군사 쿠테타가 발생했다. 무명의 육군 중위 무사 트라오레가 이르킨 무혈쿠테타로 인하여 건국의 아버지인 케이타 대통령는 쫓겨나고 젊은 장교 트라오레가 <군사위원회>의 의장이되여 정권을 장악했다. 사회주의 통치자인 케이타 대통령은 집권 7년 7개월만에 정권을 쿠테타세력에게 빼앗기고 물러나고 말았다.

육군 중위 무사 트라오레는 정권을 장악하고 1971년에 대령으로 진급하고 군정의 국가수반의 위치를 확보했다. 트라오레 대령은 <군부해방위원회,CMLN>를 조직하여 국가통치기구를 만들고 대통령이 됐다. 그는 케이타 전 대통령이 창설했던 모든 사회주의적 조직들을 완전히 철폐시키고 새로운 명칭으로 재조직하여 친서방적 청치형태를 이루어 놓고 통치를 했다.

트라오레 대통령이 친서방적 자유주의적 정치형태를 취한다고 역설했지만 모든 면에 있어 민중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고 있었다. 트라오레 대통령은 집권 기간에 여러차례 반군의 쿠테타 시도에 시달렸으며 또한 학생들의 데모가 항상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북부 사막지역에 있는 호전적 투아렉 반군에대한 가혹한 진압으로 인하여 민중들의 반정부감정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반정부 민심이 극에 달했을 때 박정희를 제거하고 전두환 정권을 창출시켜 위기를 돌린 미국은 말리에서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말리에서 반정부 데모에 시달리고 있는 트라오레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하여 미국은 아마두 투마니 투레 장군이 군사 쿠테타를 이르키도록 공작을 했다.놀라운 사실은 미국의 하수인으로 쿠테타를 이르켜 군부 독재를 23년동안이나 감행하다가 역시 쿠테타에 의하여 1991년 쫓껴난 트라오레 전 대통령은 1999년에 횡령죄로 그의 아내와 함께 사형언도를 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1991년에 아마두 투마니 투레 장군은 미국이 시키는대로 쿠테다를 주도하여 트라오레 대통령의 정권을 붕괴시켰다. 쿠테타에 성공한 아마두 투마니 투레는 임시정부 수반으로 당분간의 역할만 할뿐이었다. 미국은 말리정권 민간인 정부를창설하기 위하여 새 정부에 민간인을 등용하여 새정부를 수립하도록 계획하고 있었다.

미국은 민간인 수마니 삭코를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세웠다. 그리고 미국은 1992년에 말리에서 처음으로 다당제 선거를 실시하도록 공작하여 이른바 민간인 대통령으로 알파 코나레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데 성공했다.

미국은 말리의 사회주의자 초대 케이타 대통령을 군부 쿠테타로 제거시키고 그후 24년 안 친미적 트라오레 대통령 군정을 유지해 오다가 미국의 영향력을 계속하여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번에는 다당제를 도입시켜 1992년에 미국이 지지하는 알파 코나레를 민간인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알파 코나레 대통령은 1997년 재선되여 2002년까지 친미적 민간인 대통령으로집권을 하지만 2002년에 미국은 아마두 투마니 투레 장군을 또 다시 등용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했으며 그는 무난히 당선되였다. 아마두 투마니 투레는 현역장성 때인 1991년에 미국이 시키는 군사 쿠테타를 주도하여 미국의 골치거리인 투라오레 정권을 붕괴시켜 공적을 세운 경력을 가지고 있다. 아마두 투마니 투레 대통령은 2007년에 재선되여 말리의 현직 대통령으로 프랑스와 미국에게 우호적인 친서방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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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의 말리는 어떠한가? 2010년 8월 6일 미국 국무성의 발표에 의하면 미국인의 말리 여행은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문을 발표했다. 미국인은 물론 유렵인여행자들에게도 말리는 위험지대라고 경고했다. 말리에 일반여행은 물론이고 특별한 행사에 참가하거나 국가 공무에 해당하는 여행도 정부의 특별한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발표했다.

왜 말리인들은 반미적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은 지난 60년 동안 계속하여 군부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지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리의 주요 농산물 수출은 목화이다. 그런데 말리의 목화 값 1 킬로 그램에 3 달러였는데 미국의 세계화정책으로 인하여 0.3 달러로 떨어졌으나 정부는 아무 대책이 없다. 미국은 말리의 농민들을 집단으로 죽이고 있는것이다.

미국은 Al-Qaeda의 문제를 무조건 사막지대의 나라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면서 특히 말리 영토에 미군을 주둔시킬 뿐만 아니라 말리군인들에게 Al-Qaeda와 싸우도록 강제로 훈련을 시키고 있다. 말리인들은 절대로 Al-Qaeda를 원수로 여기지 않는다. 말리에 대한 미국의 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1591년 부터 1960년대까지 장장 350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으면서 얻은 것은 1인당 국민 1년 총수입은 250달러의 극빈국과 현재 15세 이상 구 중에 31% 만이 문자를 해독할 정도로 문맹율이 매우 높은 나라라는 것이다.


부르키나파소의 간추린 역사

부르키나파소는 말리와 가장 인접해 있는 나라로서 면적이 274,200km2로 한반도의 1.2배되며 인구 1,500만으로 작은 나라이다. 국민 1인당 1년 총수입 217달러로 세계 최빈국 서열 13번째이며 문맹율 81%이며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다.

부르키나파소의 역사는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에 3개 왕국이 있었는데 이중에 가장 큰 왕국은 모시족 오우가도우 왕국이였다. 14-16세기 동안에 모시족은 이웃 말리 송가이 제국 등과 빈번한 분쟁이 있었으며 늘 패배하였다. 하지만 모시족의 오우가도우 왕국은 19세기 말에 이웃 나라들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기 위하여 프랑스의 원조를 청했다.
기다렸던 프랑스는 쉽게 1947년 부르키나파소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958년에는 프랑스 식민지 공동체에 속해 있다가 1960년에 완전 독립국이 됐다. 1960년에 독립을 쟁취한 후에 <민주연합>은 새 헌법을 제정하고 모리스 야메오고가 초대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1966년에 육군 중령 라미자나가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쟁취했다. 라미자나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자신의 군사정권을 해체하고 민간인 정부를 만들고 민간인 다수의 내각을 구성하고 다당제 민주주의 선거를 실시하는 획기적인 정치적 변화를 이르켰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서 거의 10년동안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하여 국가의 경제는 파산위기에 처했으며 아사자들이 발생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설상가상 으로 말리와의 분쟁이 심화되고 있었는데 양국의 국경지역에서 예상되는 천연광물의 소유권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분쟁이였다.

라미자나 대통령은 어려운 시기에 재선되여 1980년까지 장기집권을하기는 했으나 제르보 대령이 군사 쿠테타를 일르켜 정권을 교체했다. 제르보 대령은 1982년에 또 다시 다른 쿠테타로 전복되고 말았다. 1960년에 독립을 쟁취한 후 23년동안 나라와 민족의 운명은 자연의 재해보다 더 큰 인재로 인하여 발생하는 빈곤과 부패와 외세의 노골적인 냉전체제하의 간섭과 침략행위로 인하여 세계에서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1983년에 부르키나파소는 <인민구제위원희>가 발족하여 구국운동이 전개?다.
<인민구제위원회>의 총리가된 토마스 상카라 대위는 구국의 사명감에 불타는 애국적 청년 장교이였다. 상카라 대위는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정권을 쟁취한 후에 나라의 명칭을 지금의 <부르키나파소>로 정했다.

그때까지 공식 나라 명칭은 <오트볼타>가 나라의 공식 명칭이었다. <부르키나파소>는 <고결한 사람들의 나라> 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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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상카라??

토마스 상카라는 누구인가?

토마스 상카라는 그의 나이 19세에 공군에 입대하여 낙하산 장교가 됐다. 그는 음악가로 이름난 밴드의 기타리스트이기도했고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낭만적 젊은이였다. 하지만 그는 27세 때 군인 훈련소 지휘관이 되어 정부의 심각한 부패와 사회적 불평등과 불안에 대하여 눈 뜨고 빈부격차문제, 여성학대문제 그리고외세로 인한 착취에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상카라는 군부내에서 <공산주의장교그룹,ROC>을 결성하여 매국적인 부패정권을 타도하고 정의를 위하여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981년 상카라는 30세의 젊은이로 정부의 차관에 임명되여 처음 각료회의에 참가하면서 자전거를 타고가는 모습으로 유명했으며, 정부 일을 그만두었다가 또 다시 1983년 1월에는 총리로 임명되였다.

하지만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지시로 상카라는 곧 해임되고 가택연금을 당했다.
1983년 8월에 상카라는 4인방을 구축하여 <국가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
상카라는 위원장이되었고 앙리 총고, 장 밥다스테 그리고 블레즈 콩파오레 등이 가담하였다. (블레즈 콩파오레는 후에 혁명운동에 배신자가 ?다)

토마스 상카라가 주도하는 <국가혁명위원회>는 정권교체에 성공하였으며 곧 상카라는 부르키나파소의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상카라 대통령은 그동안 군대의 망국적 반민족적 인물들을 모두 다 추방하였다. 그리고 상카라 정권은 그동안 권리만을 주장하는 부족장들을 설득하여 혁명적 민중의 법에 순복하고 협조하도록 설득했다. 상카라 대통령은 공금횡령죄와 부패정치인들을 심판하는 새로운 법정을 설치하여 수많은 불법공무원들을 구속하고 처벌했다.

1960년에 프랑스로 부터 독립은 했지만 상카라 대통령정권이 등장하기까지 23년동안 누적된 비극적인 국가 부패와 망국적 현실에 대하여 대략 살펴본다.

ㄱ. 세계은행 통계를 보면 국민총생산은 세계 170개국 가운데 124위이며 1인당 국민 소득은 국제적 순위로 164위로 최악의 상태였다.

ㄴ. 전국 마을 수는 7,000인데 학교가 있는 마을은 1,300뿐이다. 아이들의 취학율은 20%에 불과했다. 교사도 1만 8000명이 부족한 어두운 현실이었다.

ㄷ. 지금까지 부패한 정권에 종사하는 과다한 공무원 수는 3만 8,000명인데 공무원들에게 지급되는 관료비는 국가 예산의 70%이상이다. 그나마 국가 예산이 바닥이 나면 정부는 공무원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하여 외국의 원조를 구걸했다.시골의 민중들은 굶어 죽지 않으려고 흰개미를 잡아먹는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군사정권은 3만 8000명의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 공무원들 힘에 의지하여 통치를 하고 있다.

ㄹ. 부르키나파소의 고질적인 사회문제는 <인두세> 제도이다. 국민은 누구나 정부에 인두세를 내야한다. 만일 인두세를 못내면 강제노등에 동원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여성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300여년동안 서구문명국가들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다가 독립이 되기는 했지만 독립한 신생국 부르키나파소의 국가적인 비극과 어두운 면을 필자는 이 글에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필자는 토마스 상카라의 정권 등장으로 인하여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불평등의 어두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인간다움과 민족의 자부심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희망에 불타 오르고 있는 부르키나파소의 새로운 국면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 본다.

ㄱ. 토마스 상카라 대통령은 외세가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한 사회정의는 절대로 이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일으킨 개혁의 근본적 이유와 목적은 이 거대한 외세의 험난한 산을 어떻게 넘을 수 있을까 하는 과제였다. 혁명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ㄴ. 상카라 대통령은 3만 8000영의 공무원 수를 대폭 줄이는 방법으로 <자주관리정책>을 도입하여 전국에 30개 자치제 행정기구를 창설하여 주민들 자신들이 그 지역을 다스리도록 했다. 지역 관리도 그 지역에서 직접 선출하도록 제도화했다. 각 지역의 종족들의 거주지와 일치하도록 행정구역을 고려했다.

ㄴ. 상카라 대통령의 큰 공적은 도시와 지방간의 간격을 좁히는 방법으로 철도를 건설하는 사업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과거 아프리카에서 철도건설은 인명피해라는 나쁜 기억이 남아 있다. 하지만 상카라 대통령의 철도건설사업에는 온 국민이 자발적으로 금전적 보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쌀과 물만 제공해 주면 인원동원이 가능했다. 도시에서부터 사막의 시골까지 약 450 km의 철도를 개설했다.

ㄷ. 상카라 대통령의 개혁의 공로는 고질적인 인두세를 왼전히 철폐하였다는 점이다. 1983년을 기하여 획기적인 변혁을 이르켰다.
그리고 상카라 대통령의 개혁운동의 또 하나의 큰 공로는 농지개혁의 성공이다.
상카라는 국가 농업부에서 전국의 토지대장부를 작성하도록 했다. 토지를 농부들 각 가정의 수요에 따라 토지를 재분배하는 과업이었다. 이 토지개혁으로 인하여 전국의 농부들은 안심하고 농사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상카라 대통령의 토지개혁으로 인하여 4년후에 전국의 농업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여 국가지출을 도로공사와 상수도건설 그리고 공업발전에 우선 투자하도록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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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토마스 상카라 대통령의 개혁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의 개혁정신은 강대국의 입에 발린 말뿐인 구호와 원조는 결국은 헛수고로 끝나고 마는 응급 조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강대국들의 입에 발린 구호만으로는 약소국가들의 슬픈 역사는 영원히 계속된다는 교훈이다. 약소국가들의 빈곤의 문제해결의 길은 오직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만이 출구라고하는 사실을 상카라 대통령은 확실히 깨달았다.

토마스 상카라 대통령의 죽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토마스 상카라 대통령의 혁명은 부르키나파소의 민중에게 큰 희망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아프리카 이웃 나라들에게도 큰 빛을 뿌렸다. 정치적 부패와 친 서방 독재정권에 시달리고 있는 이웃나라들과 아프리카 모든 나라에게 큰 영향이 미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크게 염려하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와 미국이였다.

특히 친미적 부패정권으로 유명한 코트디부아르의 부아니 대통령, 가봉의 봉고 대통령, 토고의 에야데마 대통령등 친미 독재자로 알려진 여러 나라의 대통령들에게는 토마스 상카라 대통령의 과감한 개혁운동은 큰 충격을 주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개혁적 예언자들은 살해되여야만 했던가!
1987년 10월에 <토마스 상카라 혁명위원회>의 회원이며, 참모이며, 또한 동지이였던 콩파레에 의하여 상카라 대통령은 애석하게 살해되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이 지원하고 콩파오레가 주도하는 쿠테타에 의하여 상카라 대통령의 혁명정부는 붕괴되고 상카라 대통령은 미국에 매수된 동지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토마스 상카라 대통령의 죽음은 저 중남미 살바도르 아옌다의 죽음과 똑 같은 강대국의 세력의 조정을 받는 자국의 반역자의 손에 의하여 죽은 것이였다.

토마스 상카라 대통령은 자기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감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죽기 한달 전인 1987년 9월에 에티오피아에 여행 중에 있었는데 우연히 만난 UN 인권위원회 자문위원인 지글러와의 대화에서 20년전에 죽은 쿠바의 혁명지도자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의 산 중에서 정부군에 의하여 살해된 이야기를 신중하게 이야기 하면서 체 게바라의 나이를 물었다고 한다.

체 게바라는 그의 나이 39세에 죽었다고 지글러 박사가 대답했다. 지글러 박사의 대답를 듣고 상카라 대통령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 했다.
<나도 그 나이까지 살 수 있을가요?>라고 지글러 박사에게 말을 했다는 것이다.

토마스 상카라 대통령의 죽음을 알게된 부르키아파스 민중들 전체는 슬품에 잠겼으며 서아프리카 나라들은 물론이고 전아프리카 나라듣이 애도의 표시를 전했다.
하지만 상카라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진압되고 외세를 업고 다시 등장한 콩파오레 정권은 시계를 완전히 뒤로 돌리고 친미와 구종주국 프랑스와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극단적인 외세의존적 국가로 복귀되고 말았다.

토마스 상카라 대통령의 죽음을 초래한 반역자 콩파오레의 치하의 독재정권의 복귀는 세계를 지배하는 황금산 밑에서 굶어 죽어가는 자들의 무덤이 ?다.
이 세상에서 강대국의 함이 제아무리 끔찍하다 할지라도, 또 어떤 보수주의적 종교의 이념이 비록 강하다 할지라도 근본적 살인적 악의는 인간의 불안과 불행을 초래할 뿐이며 오직 혁명으로 꽃피게 될것 뿐이다.


이글을 끝 맺으며...

필자는 이 글에서 이 지구상에서 불의와 기근, 살인과 독재를 가능케하고 있는 그 어떤 근원적 깊은 뿌리와 맥락에 대하여 우리는 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그 역사의 전체를 파악하고저 함에 큰 뜻이 있음을 밝히고져 한다.

이 지구상에서, 특히 고난 받는 제 3세계에서 강자들은 설교를 가지고 있고 반면에 약자들은 굶주림을 가지고 있는 그 근원적인 깊은 뿌리와 맥락을 바로 이해하고 파악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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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12/16 [01:34] ?최종편집: ⓒ 자주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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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돈(후원.기부.세금)이 도적넘들에게 새는 부정부패비리 뿌리를 뽑아야 한다 44444 10/12/16 [02:27]
'사랑의 열매'비리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불우이웃돕기 기부금이나 후원금을 걷는 복지재단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개별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찾아 기부나 후원을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탐욕에 눈 먼 자들의 아가리에 생돈을 넣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수정 삭제
의존할 나라없으면 정치못하는 우리가남이가사대세력이 문제다 짱꼴라흉노들 10/12/16 [02:28]
사대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주변 외세들이 껄떡거리게 된다.외세보다 내부의 적부터 척결하는 길이 중요하다 수정 삭제
멍청이들은 죽어야지. 멍청 10/12/16 [03:05]
그냥 미국 시키는 대로 돈이나 스위스 은행에 갖다 놓고 두고두고 잘 먹고 잘 살면 될 걸 왜 괜한 짓 해서 뒈지냐?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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