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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통합으로 몸살앓는 예멘의 교훈
[유태영박사의 제3세계민족해방운동사] 6.15공동선언에 의한 통일의 절박성을 일깨워준 예멘 통일과 그 후
유태영 박사

▲ 예멘에서는 무리한 체제 통합식 통일 이후 소년들까지 전투에 동원될 정도로 내전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 ? ? 자주민보/ 사진 다음 검색


▲ 예멘 정부군이 테러와 내전에 대비하여 성을 쌓고 경비를 강화하지만 사태는 악화일로, 과연 경비강화로 테러를 막을 수 있겠는가! ? ? ? 자주민보/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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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은 아라비아 반도 서남단에 위치한 나라로 총 면적이 한반도의 약 2.4배 (527,970 평방km) 되지만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지대이고 서쪽 해안지역에 비옥한 농경지역이며 지하자원으로 석유, 대리석, 금과 납 등이 있다. 인구는 2천 4백만이며 종교는 이슬람이 절대다수이고 기독교는 1%에 불과하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솔로몬 왕에게 시바의 여왕이 희귀하고 값진 선물을 가져왔던 왕국이 바로 예멘이였다고 고고학자들은 말한다. 옛날의 예멘은 “홍해의 흑진주”로 부르는 영화의 나라였다. 하지만 오늘의 예멘은 오랜 식민통치로 인하여 아랍권에서 가장 낙후한 나라로 떨어져 있으며 세계에서 최빈국중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예멘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이기도 하다.


국제무기조사 기관의 발표에 의하면 예멘 전체 국민이 소유하고 있는 총기의 수는 1천 7백만 정으로 성인 1인당 평균 3정의 총기를 보유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한 나라로 분류되고 있다. 최근 4년간의 통계에 의하면 2만 3천 건의 총기사용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작은 나라에 하루 평균 16건의 총기사고가 매일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총기사고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사건은 예멘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납치하는 사건이며 다음으로 외국인 사업가들과 관광객들을 납치하는 사건이 계속하여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례로 1998년 1월에 주예멘 한국대사관의 한 외교관의 부인과 딸이 교민 1인과 함께 무장한 예멘인에 의하여 납치되는 사건이 있었다. 또 방금 최근에 2009년 3월 15일에는 이른바 “세이윤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하여 한국인 관광객 일행인 18명중에서 폭탄으로 4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한국정부 관계자와 유족들이 예멘에 갔는데 또 다시 폭탄공격을 받았으나 이번에는 인명 피해가 없었다고 했다. 예멘의 무장세력이 왜 한국인을 테러의 대상으로 삼고 있을가?


그 대답은 극히 간단하다. 한국은 미국이 중동에서 벌리고 있는 침략전쟁에 있서서 미국의 요구에 무작정 따르고 있는 미국의 추종자 동맹국이 되고 있기 문이다.

한국도 이제는 독자적인 중동정책을 세워 성숙한 외교정책을 확립해야 한다.


한국인이 이슬람권에서 테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실이 이제는 먼 나라의 애기가 아니라 몇 년 사이에 급증했는데 지면상 제한으로 12번 발생한 사건만을 밝힌다.



1. 예멘의 간추린 역사


예멘은 3000년 이상 된 고대의 풍부하고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이다. 전통에 의하면 예멘의 선조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인 욕단의 후손들로서 부족왕국을 이루어 비옥한 계곡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다고 한다.


BC 12세기부터 AD 6세기에 이르기까지 미나 왕국과 사바 왕국이 예멘을 통치했는데 이집트, 그리스와 로마에 향료 등의 무역국이 되었고 풍부한 농업적 부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시바 여왕(열왕기상 10장)이 솔로몬을 방문하여 향료와 보석을 선물하고 지혜를 배웠다는 옛 역사 이야기는 오랜 동안 전해지고 있다.


사바 왕국 이후에 예멘은 카타바, 하미아리트, 아우산, 하드, 라마우트 왕국 그리고 페르시아의 침략 등 여러 왕조시대를 거쳐오다가 7세기에 이르러서 예멘은 이슬람시대의 문호를 열게 되었다.


이슬람 수니파는 예멘의 남부 평야지대를 통치했고 시아파계의 자이드파는 예멘의 북부 고원지대에 자리를 잡고 통치를 ?다. 하지만 9세기에 이르러서 북부의 자이드파의 이맘(Imam)이 라지드 왕조를 창건하고 예멘의 전 지역을 통치했다.


이맘이 창건한 라지드 왕조는 1872년까지 예멘을 통치하다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의하여 정복되어 완전히 패망하고 예멘을 떠나가고 말았다.


이맘의 라지드 왕조가 떠나간 후에 예멘은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다시 받게 되었는데 이때에 영국은 재빠르게 예멘의 남부지역을 강점하여 예멘의 국토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비극적 운명이 이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예멘이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를 새로 받기 시작하는 정치적 대 변동기에 영국은 이 기회를 악용하여 재빠르게 행동하여 예멘의 남부 요충지역인 아덴항구를 영구적으로 탈취했던 것이다.


영국이 아덴항구를 탈취한 이유가 무엇인가? 영국은 이베리아 반도의 전략적 기지로서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이미 아덴항구를 탈취하고 있었지만 특히 1869년에 수에즈운하가 새로 개통됨으로 인하여 영국은 남예멘의 아덴항구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어 장기적 점령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와 싸워 승리하여 예멘의 남부지역을 강점하는데 진출함으로써 예멘을 남과 북으로 나누어 분리통치한 장본인이 되고 있었다.


영국이 예멘의 남부지역을 강점한 사건은 바로 예멘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비극적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처럼 한반도의 분단의 비극적 역사는 바로 1945년에 미국에 의하여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진 사건에서 발생했다.

그럼으로 예멘이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분단된 것처럼 약소민족들이 당하는 공통된 비극이었다.



2. 북예멘의 독립운동


예멘을 지배하던 오스만 투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어 1918년에 50년 동안의 지배를 끝내고 예멘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오스만 투르크가 철수함으로 인하여 예멘은 옛날 이맘왕정으로 복귀하여 이슬람의 신정정치가 다시 부활되어 신정혼합정치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남쪽예멘에서는 딴판이었다. 남예멘은 이미 1839년부터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북예멘에 복귀된 이슬람 왕정과는 전혀 무관한 상태였다. 남북으로 분단된 두개의 나라로 굳어져 정면으로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북예멘에서 회복된 이맘이슬람 왕정은 어떠했는가? 정치적 진로에 있어서 결코 순탄하지 못하고 북예멘 안에서 항상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물론 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상태에 발생한 위기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구시대적 이슬람 왕정에 대한 반발로 <왕당파>와 <개혁파>의 대결이었다. 개혁을 원하는 시대적 요구가 크게 작용하여 북예멘의 정치적 불안의 요소가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스만 투르크가 떠나가고 이슬람 왕정이 다시 회복된지 54주년이 되는 1962년 9월에 북예멘에서 육군 장교 살레 중령이 주도하는 군부의 쿠테타가 발생하여 왕정은 무너지고 <예멘아랍공화국>이 새로 창건됐다.


미국과 소련은 앞 다투어 새로 창건된 북쪽의 <예멘아랍공화국>을 즉시 승인했다. 하지만 영국은 남예멘을 강점하고 있음으로 심통을 부리면서 새로 창건된 북쪽의 <예멘아랍공화국>에 대한 승인을 당분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부의 쿠테타로 새로 창건된 북쪽의 <예멘아랍공화국>은 또 다시 순탄치 못하여 16년 동안에 4명의 대통령이 등장했는데 쿠테타 혹은 암살을 당하여 4명의 대통령들이 모두 다 사라져 없어지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1978년에 쿠테타의 주동자 살레 중령이 대통령이 되였는데 살레 대통령도 두 번이나 암살의 위협을 당했으나 요행히 살아남아 대통령의 임무를 계속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새로 창건된 북의 <예멘아랍공화국>은 친미 보수적인 군부정권이 되고 있었으며 미국이 뒤에서 살레 대통령을 일일이 간섭하고 있었다.

미국은 계속되는 북예멘의 내부혼란에 대하여 엉뚱하게 남예멘의 개입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어쨌든 북남 사이에 무력충돌이 1972년과 1979년 두 번이나 크게 발생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북예멘의 살레 대통령은 남예멘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남예멘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영국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려고 의도적으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영국은 예멘의 분단에 대하여 “병주고 약준다”는 옛 격언을 그대로 행동함으로 북예멘과 은근 내통하는 영국의 침략적 근성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3. 남예멘의 독립운동


1839년부터 128년 동안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남예멘에서도 1963년부터 비로소 처음 독립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영국은 할 수 없이 남예멘에서 철수를 시작했고 1967년에 심한 폭력사태가 일어난 후 남예멘은 1967년 11월 30 일에 <남예멘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했다.


1970년에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멘민주주의인공화국, PDRY>으로 국명을 정하고 모든 정치활동과 정당활들을 모두 하나로 통합된 단일 정당을 만들어 <예멘사회주의당,YSP>을 이루게 됐다. 남부 예멘에서 PDRY이 공식적으로 창당이 됨으로 예멘은 돌이킬 수 없는 분단의 역사가 시작됐다.


<예멘인민공화국>은 미국과 단교하는 한편 중국과 소련의 원조를 끌어 들임으로 아랍국가들 중에서 최초의 사회주의국가로 출발했다. 인구는 남예멘 보다 북예멘이 3배나 더 많음으로 군사력에 있어서 북예멘이 훨씬 더 우위에 있었다.


<예멘인민공화국>의 제1대 알샤비 대통령(1967년)과 제2대 알리 대통령(1978)은 남예멘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크게 공헌하지 못하고 불명예로 퇴진했다.


하지만 남예멘이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창건한 후에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1986년에 발생한 내란이었다. 이 내란의 내막은 온건 우파인 무함마드 대통령의 세력과 이를 반대하는 강경 좌파인 <예멘사회주의당>의 서기장 이스마일 사이에서 발생한 두 세력 간의 권력투쟁에 의한 내란이었다.


온건 우파인 무함마드 대통령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권력을 이용하여 친위 쿠테타를 스스로 일으켰다. 친위 쿠테타를 일으킨 온건파 무함마드 대통령은 처음에는 승리자가 되여 예멘사회주의당의 강경파의 지도자 이스마일 서기장을 비롯하여 4명의 중요한 당 간부들을 살해하는데 일단 성공하기는 했다.


하지만 후에 분발한 좌파군부의 강력한 반격과 폭격으로 인하여 양측에서 심한 희생자가 발생하고 장기적 내전으로 발전했다.

장기적 내전의 결과로 결국 우파 무함마드 대통령은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정권을 포기하고 북예멘으로 망명하는 긴급한 사태로 발전했다.


이 내전으로 인하여 <예멘사화주의당>의 주요 간부 50여명이 사망했고 2000명의 당원들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당의 정치국원 알 바이드가 <예멘사회주의당>의 새로운 실권자로 등장하게 됐다.


다행히도 <예멘사회주의당>이 사태를 잘 수습했고 오히려 친위 쿠테타를 일으킨 현직 남예멘의 대통령이 북예멘으로 망명을 하게 된 것은 분명히 소련의 긴급대책이 배후에서 도움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전 당시 소련에 여행 중에 있던 남예멘의 아타스 수상은 귀국하여 당의 새로운 서기장으 등장한 알 바이드와 함께 내전 후의 어려운 문제들을 잘 통치했다.


또한 서방을 배경삼고 있는 북예멘과의 관계를 풀어 나가는데 있어 실질적으로 문제를 잘 처리했으며 미국을 등에 업고 있는 북예멘에 남침에 대한 경계심을 잠시도 늦추지 않고 대비하고 있었다.


<예멘사회주의당>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알 바이드는 누구?

알 바이드는 영국식민 통치 때 수도 아덴항구에서 노동운동에 가담하면서 반영독립운동 단체인 <민족전선>의 창립에 젊은 시절에 가담했다. 그는 조직 내에서 좌파에 속하는 열성적 당원으로으로 활약했다. 그는 조직 내에서 항상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우파 보수세력을 숙청하는데 언제나 앞장섰다.


알 바이드는 1969년에 영국의 침략자들을 남예멘에서 완전히 추방하는 독립운동에 선봉자 이였으며 <민족전선>의 반영국 무혈 쿠테타에 가담하였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남예멘이 독립한 후에 정부에 입각하여 외무장관을 역임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남예멘의 지도층으로 부상한 아타스 수상과 바이드 서기장은 여러 면에서 남북화해를 위하여 노력하여 북으로 망명한 무함마드 대통령의 우파 추종자들에 대한 관용을 베풀어 주는 화해정책을 시도했다. 물론 일부에서는 그 당시 소련 공산당과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의 영향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어쨌든 남예멘의 통치자들은 과거보다는 통일문제에 긍정적으로 많이 전향하고 있었다.


1972년 9월과 1979년 2월에 두 번째 남북국경선에서 치열한 분쟁이 발생했다. 하지만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연맹국들의 적극적인 중재역할에 따라 카이로에서 정상회담이 있었고 두번째 쿠웨이트 정상회담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남과 북은 통일을 향하여 많은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1986년 7월과 1988년 5월에 남예멘의 사회당 서기장 알 바이드와 북예멘 살레 대통령이 리비아 카다피 대통령의 초청으로 트리폴리에서 둘이 함께 만났다.

두 지도자는 통일 및 피난민 교환 등 여러 실제적인 문제들을 토의하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접촉할 것을 합의했다. 이와 같은 남북 간의 잦은 접촉과 론의를 진행한 결과로 인하여 어떤 결실을 맺었던가?



4. 민족통일이 아닌 제도통합


1990년 5월 22일에 남예멘과 북예멘 두 제도가 하나로 통합되는 <예멘공화국>의 창건을 전격적으로 선포했다.


1962년에<예멘아랍공화국>이 창건됐고 1963년에 <예멘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남과 북에서 각각 분단된 예멘이 28년 만에 두 개의 제도가 <예멘공화국>으로 통합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통합된 <예멘공화국>은 북쪽에 있는 시나를 “시나행정수도”라 명명하고 남쪽에 대한 보상으로 아덴항을 “아덴경제수도”라 명명했다. 대통령은 북쪽에서 살레 대통령이 통합예멘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남쪽의 알 바이드 사회당의 서기장이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와 같은 전격적인 예멘의 제도적 통합에 대하여 세계 동서 양진영의 정치적 평론가들의 관찰은 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예멘의 전격적인 제도적 통합은 순전히 시급한 경제적 실리 때문에 무작정 이루어진 매우 불건전한 야합이라고 분석했다.


분단된 나라의 <민족통일의 기본적 원칙>은 다음 세 가지 원칙이 매우 중요하다.


1) 민족 화해에 의한 민족통일

2) 외세가 배제된 자주적 통일

3)경제적 상부상조 원측에 입각한 자립경제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


이런 기본적 원친에 입각한 통일이래야만 참된 민족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멘의 급작스러운 통합은 이 세 가지 기본적 원칙이 완전히 결여되었고 성숙함이 전혀 없는 단순히 급박한 경제문제 해결과 석유 자원개발의 시급함 때문에 참된 통일이 아닌 야합을 재촉했다고 세계적 정치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예멘에서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붕괴를 이유삼아 강자의 논리를 적용하여 무조건 밀어부치기식으로 통합을 강행했다. 또 남예멘에서는 급변하고 있는 소련과 동구권의 국제정세에 대한 조바심 때문에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통합을 피동적으로 진행됐던 것이다.


남예멘에서 석유가 처음 발견된 것은 1982년에 남부 해안지역에서 시작됐으며 그 후 네 곳에서 많은 석유매장량을 발견했다. 남부의 석유 매장량은 북부보다 3배가 많다.


하지만 예멘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악조건으로 인하여 다른 아랍석유보유국에 비하여 석유개발이 매우 뒤떨어져 있었다. 통합된 정부가 속히 들어서기만 하면 예멘의 석유산업의 개발이 촉진되어 국가경제의 사활이 달려 있는 중요한 산업이 발전될 것이라는 허망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꼭 집고 넘어가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예멘의 석유산업의 중대성은 어디까지나 통일을 대비하는데 있어서 정지작업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무조건 통일 후의 생존사활을 위한 중요한 경제력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후에 중요한 경제력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경제력이 될 것인가?


민족통일의 중요한 기본적 3대 원칙을 망각하고 시급한 경제력만을 중요시 했다.

예멘이 통합한 후에 봉착하고 있는 불행은 바로 이러한 망각에 기인한 것이다.



5. 오늘의 <예멘공화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1990년 5월 22일에 제도적 통합을 이루었던 <예멘공화국>은 1994년 5월 5일에 4년만에 통합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그 후에 전면적 내전이 이어지고 있다.


외세에 대한 민족정서와 계층 간의 지역감정문제 그리고 경제적 불균형에 깊이 뿌리 밖힌 사회적 불안심리 등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다만 일방적으로 외세를 의존하는 강자의 논리에 의한 밀어부치기식 제도통합은 곧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 언론들은 예멘통합 후에 살레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가 튼튼해졌고 미국의 지원으로 장기집권 체제의 기반이 조성됐다고 보도를 하고 있다. 미국의 예멘에 대한 경제지원은 2009년에 4030만달러에서 2010년에는 6300만 달러로 증가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막대한 원조는 살레 대통령의 친미정권을 유 지하는데 소모될 뿐 이라고 예멘민중들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서방언론들의 일방적 보도의 밑바탕에는 예멘통합붕괴 이후에 축척 돼온 남북 갈등과 하루도 쉬지 않고 폭발되고 있는 폭동과 방화 그리고 대규모 데모에 대한 군경의 무차별 최루탄 세례를 위시한 탄압의 악순환이 전국적으로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010년 1월 5일에 보도된 미국주요 뉴스에 의하면 <예멘 3개의 내전 화약고.. 미국의 선전포고로 악화일로>라는 톱뉴스를 보도했다. 미국이 예멘을 상대로 대대적인 대 테러전을 확산시킬 조짐이 보인다고 보도했다. 한편 미국의 이러한 조짐에 대하여 미국의 개입이 오히려 예멘에서 알카에다의 힘만 키운다고 우려했다.

미국은 지금 예멘에서 실제로 3개의 전쟁을 치루고 있는데 북서부에서는 시아파 반군과, 남부에서는 분리운동세력이 살렐 정부군과 싸우고 있고 그 틈을 타 동부에서는 알카에다가 기승을 부리면서 세를 확장하고 있다.


스웨덴의 테러전문가인 란스토르프에 의하면 이라크에서 싸웠던 예멘 출신 무자헤딘 이슬람전사 2000명이 지금 예멘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소말리아의 반미조직인 알샤바브가 예멘의 반미투쟁을 지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멘 살레 대통령 정권은 알카에다에 대한 공세를 확대하고 있지만 진압 능력은 날이 갈수록 의심스럽다. 예멘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데이비트 뉴튼은 말하기를 “미국이 공세를 강화하려 한들 오히려 돈을 퍼주고 테러기지를 확산시킨 파키스탄 꼴이 될 수도 있다” 라고 개탄했다.


오늘 예멘은 부시가 일으킨 예멘전쟁이 오바마의 전쟁으로 장기화 되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의 전쟁은 예멘 알카에다의 힘을 키워주는 결과를 낳고 있을 뿐이다.

2009년 성탄절에 발생한 미 여객기 테러 기도사건에 대하여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하여 미 중부 사령관, CNN등 미국은 오통 예멘에 보복공격에 나설 것 같은 소동을 부렸다.


미국의 코네티컷 상원 의원 조지프 리버먼은 미국의 예멘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폭탄적 선언을 했다.


<이라크는 어제의 전쟁이었고, 아프가니스탄은 오늘의 전쟁이라면, 예멘은 바로 내일의 전쟁이 될 것이다>


미국은 예멘을 현재에 신중히 고려해야할 위험지구로 여기고 있다. 미국은 현재 예멘에 알카에다의 훈련소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살레 대통령에게 현지에 맹공격을 하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살레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미국이 직접 예멘 땅에 폭탄을 마구 투하하고 있다. 국제 앰네스트에 의하면 미국은 2009년 12월 17일에 예멘 아비안 주 마잘라 마을에 공습을 했는데 숨진 55명중 대부분 이 민간인이며 여성 14명과 어린이 21명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앰네스트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미국이 이 공습에 사용한 무기는 악명 높은 <집속탄> 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살레 대통령 정권은 미국의 폭격마저 부인하면서 미국을 두둔했지만 미국의 <집속탄> 사용까지 국제사회에 폭로됐다.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집속탄 사용금지 협약에 따를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면서 호전적 예멘 독재정권을 후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은 예멘을 글로벌 테러기지라고 비난하고 있으니...



맺으며...


예멘이 두개의 체제가 1990년에 통합한지 4년만에 붕괴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북간 대립이 위험수위를 넘어 내란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그 이유와 원인이 무엇인가!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오늘 예멘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이론적으로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론보다 우리나라의 실제적 삶속에서 우리 민족의 통일의 길을 찾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흔히 말들하는 우리 민족의 통일은 독일식인가 아니면 월남식 통일인가?

이런 질문과 대답도 적절치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남북정상들이 이미 역사적인 <615공동성명>에서 밝혀 놓은?<우리민족끼리> 정신에 입각?상호체재존중방식의 통일방안이?있지 않은가!


이 상호체제를 존중하는 ?<우리민족끼리>의 통일 방도는 역사에 전례 없는 새로운 민족 대단결 방법이다. 이 통일 방도는 한반도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최선의 현실적 방도이다.

<우리민족끼리>의 통일방도는 어떤 민족 내부의 문제, 또 어떤 외세가 방해를 한다 할지라고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통일의 열쇠이다. <끝> 10/09/23 유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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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9/25 [08:53] ?최종편집: ⓒ 자주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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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까리 할려면 111 10/09/25 [13:01]
1. 미군철수 2. 국가보안법 폐지

남조선괴뢰들의 돈과 기득권이 붕괴되니

체제통합을 해도 남조선은 잘 견뎌서 이겨낼거야

사회주의 와 자본주의 체제를 통합하더라도

결국 사회주의 체제가 되는데


예먼의 경우는 자분주의 기득권의 층의 반발과
가스통의 반말이심ㅎ서 ㅤㅂㅜㅀ협화음이 생긴것이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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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북베트남 어찌하여 승리했나/ 유태영 박사 2010/04/13/
[유태영] [유태영]자주국가로 방향 전환하는 나이제리아/ 유태영 박사(재미통일운동 원로) 2009/10/16/
[유태영] [유태영] 미국 사주 온두라스 쿠데타와 민중 저항/ 유태영 박사 2009/10/10/
[유태영] [유태영]다르푸르분쟁 근본원인은 서구 식민통치/ 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 은퇴목사) 2008/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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